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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 과학 사상의 시발점: 기술 산업 태동

물 긷는 남자 2024. 10. 30.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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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 과학사상〔槪說〕

 

근대 기술 산업의 태동:

1910년 국권 피탈을 강행한 일본은 총독부를 설치, 1945년 광복까지 한국의 강점을 계속하였다. 이 기간 일제는 기술교육을 비롯한 근대교육의 일반화, 실학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성장한 실용주의 정신과 민족주의 정신의 팽창, 공업에 대한 투자의 증가와 근대기술의 산업에의 응용, 근대 기계의 자립적 생산이 이루어져서 도약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던 구한말의 과학기술 수용과 개화를 위한 노력을 좌절시키고 말았다. 우리나라 과학사에서 현대과학의 본격적인 출발점은 흔히 3·1운동 이후로 잡는다. 3·1운동은 비록 일제의 무력 앞에 좌절되었지만 이후 국민은 자신의 실력을 양성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일제의 무단정치도 이른바 고답적인 문화정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과 대전의 종말로 시작되는 세계 과학사의 현대기는 세계적으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시켰고, 이리하여 20세기의 20년대와 30년대를 통해서는 민간기업 산하의 연구소와 대학의 연구실, 관 공립 연구소 등이 충분한 시설과 많은 연구 인원, 대규모의 연구 자금을 쓰는 이른바 산업 과학의 시대가 찾아온다. 3·1운동 이후의 총독정치는 일인이 말하는 수성기(守成期)로서, 이 시기에 일본의 식민지 과학기술정책은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 과학을 위한 민족적인 요청:

동아일보에서는 사설 "과학의 조선, 과학발달의 필요성을 논함"에서 당시의 한국인이 아직도 과학에 눈뜨지 못했음을 지적하면서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동(同)사설에서는 "과학의 발달을 도모함에는 ① 왕성한 연구심, ② 냉정한 객관적 태도, ③ 귀납적 방법의 사용, ④ 실험, ⑤ 일반사회의 학자 우대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런즉 신시대를 당한 우리 조선은 우선 학교에서는 수학과 물리화학과 또 널리 지식을 구하는 외국어 등에 일 층 힘을 더하며 일반사회에서는 실생활과 실지에 적절한 이학(理學)을 숭상하여 우리 조선이 도덕과 예술의 낙원이 되게 하는 동시에 과학의 광명천지가 되게 하기를 바라보라"고 하였다. 이런 사회  풍조에 따라 당시 뜻있는 선구자들은 한국 국민도 사람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서 과학을 해야 한다고 과학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던 때였다. 이런 과학에 대한 국민의 신앙에 가까운 갈구는 1922년 말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安昌男)의 모국 방문 비행으로 하나의 정점을 이룬다.

 

과학과 지식에 대한 국민의 열망: 민립대학 건립 운동으로 나타나 비록 실패는 했으나 총독부의 경성제국대학 설립(1926)으로 한국에 처음으로 대학이 설치되었다. 이와 함께 3·1운동 이후에는 1922년의 영등포 공장의 준공에 의한 경성방직의 본격적인 조업 등 민족 기업이 일어났고, 1924년에는 공업적 지식의 보급과 발명 정신의 향상을 내걸고 발명협회가 발족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과학지<과학조선> (1933 창간)을 내놓을 발판도 마련했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여망은 1930년대에도 변치 않았고 흥남 질소 비료공장, 수풍댐 건설공사 등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 속에서 과학지식 보급회 활동이 활발했고 1934년 4월 19일의 '과학 데이'는 전 국민의 관심을 이끌었다. 이 시기에 일본은 만주를 강점하고 1937년 중일 전쟁에 접어들었으며, 한국의 산업구조는 일부 군수 공업 건설까지 곁들여 중공업 방향으로 전환하는 듯했으나 그것은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완전히 일본인의 것이었고, 한국인은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을 뿐이다. 결국 이런 발전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 문제가 있다. 그것은 군수산업의 일방적이고 기형적인 발전일 뿐이어서 공업의 발전을 뒷받침하고 함께 진보했어야 할 기초과학의 연구나 연구개발을 조금도 하려 하지 않았다.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한국의 군수기지는 더욱 박차를 가하고 일본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설치(1938)에 이어 기술계 고등교육기관의 확충이 계속되는 속에서 광복을 맞았다. 1910년에서 광복까지의 총독정치 기간은 한국과학 사상 서구의 교육제도와 과학기술을 도입하는 시기였다. 36년의 오랜 기간에도 불구하고 광복 후의 과학 기술계가 혼란만을 맛본 것은 이것이 한국민을 위해 한국인이 한 것이 아니고 일제의 식민지 통치로 조정되고 일본을 통해서 진행되었다는 데 원인이 있었다. 이에 따라 일제하에서의 한국과학은 제도적으로 기초적인 연구가 없는 과학으로 시종하여 정체를 면치 못했고, 일부 뜻있는 젊은이들은 개인적인 열의로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 과정을 마치는 정도였다. 그리고 이들 중 극소수가 대학원을 거쳐 일본에서 연구 생활을 계속하고 대부분은 귀국 후 교직이나 생산업체 기사, 관리 생활에 들어갔다. 이런 불모의 지역에서 과학을 배워 우리의 힘을 키우자는 시대정신에 따라 일제하에서의 한국과학은 서구과학을 도입, 부분적인 연구 성과를 기록했다. 그중 특히 두드러진 것으로 생물학 부에서는 현신규(玄信圭)의 <소나무와 산나무의 일광조사와 토양 등 외부요인에 대한 발육상태의 실험보고>  등과 석주명(石宙明)의 나비에 관한 업적이 있었고, 농업 부문에 있어서는 육종사업(育種事業)이 시작되어 우장춘(禹長春)이 육종학(育種學)연구에 큰 성과를 올렸다. 또한 이태규(李泰圭)는 경도 제국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양자화학(量子化學) 분야를 연구했다. 한편 의학 부문은 다른 분야에 비하여 큰 발전을 보였으니, 이는 세계 의학계의 정상을 걷고 있는 독일의 의료기술을 일본을 통해 도입할 수 있었고, 기독교 각 교파의 의료사업을 통해 미국의 의학을 직접 도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수용된 일본의 의학지식은 주로 의학 교육과 행정적인 위생시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경성 의학전문학교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등이 설립되어 이 방면의 교육적인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이때 의학계의 대표적인 인물은 오긍선(吳兢善)이었다.

 

 

吳兢善(오긍선) (1878-1963)

의학자·교육가·사회사업가. 본관 해주(海州). 호 해관(海觀). 공주 출생. 1896년 주사(主事)가 되고 98년 독립협회 간사가 되었다. 1900년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에 입문하였다. 이듬해 배재(培栽)학당을 마치자 미국으로 건너가 켄터키주 중부 대학에서 물리·화학을 전공, 1909년 루이스빌 의과대학 졸업과 동시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귀국하여 군산 야소교(耶蘇敎) 병원 원장이 되었다. 1910년 군산 영명 중학·안락 학교 및 교회를 설립하고 광주·목표의 예수병원장을 거쳐 정명 여학교 교장을 지냈다. 12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 겸 의사로 있다가 16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제국대학에서 피부과를 연구하고 돌아와 경성보육원을 설립하였다. 21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거쳐 부교장으로 있으면서 다시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피부학을 연구하였다. 귀국한 31년 경성양로원을 설립하고, 한편, 8·15광복 후 전국 사회사업연맹 이사장, 52년 한국 사회사업연합회 회장으로서 사회사업 분야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 밖에도 그리스도교 단체 등에서 많은 공직과 명예직을 역임하였고 고아 사업에 헌신한 공로로 새싹 회로부터 제7회 소파상을 받았다. 또한 62년에는 대한민국 공익포장(公益褒章) 등의 표창을 받았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미약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과학의 정신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선열들의 공적을 재삼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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