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및 업적
전주이씨로 한국 최초의 화학 분야 전공 이학박사로 양자역학을 화학반응 연구에 도입한 과학자로 유명하며,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창의 중부(들째 큰아버지))이다.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경성고등보통학교거쳐 1922년에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마치고, 일본 교토 제국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여, 1931년 "환원 니켈"을 이용한 일산화탄소 분해"라는 논문으로 한국인 최초로 화학 분야 박사 학위를 한국인 최초로 받았다.
1938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초청 과학자로 재직하다1941년 교토 제국대학으로돌아가 양자화학을 가르쳤고 1943년 정교수가 되었다.
해방 후 귀국하여 경성제국대학교 이공학부 부장과, 서울대 창설 무리과 대학 학장이 되었으나 국대안 파동의 여파로 1948년 미국으로 돌아감.
1954년 학술원 종신회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55년헨리 아이링과 함께 비뉴턴 유체에 대한 연구를 하여 ‘리 아이어링 이론(Ree-Eyring theory)’을 발표하였다.비뉴턴 유동이론은 물체의 변형속도가 외부작용(stress)에 비례하지 않는 비뉴턴 유동에서 점도(viscosity)의 변화를 이론으로 설명한 것으로 그동안 이론적 접근이 어려웠던 비뉴턴 유동현상을 다루는 일반 공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 연구업적은 두 교수의 이름을 딴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으로 불렸다.
1965년에는 노벨상 수상자 후보 추천위원으로 위촉 된데 이어, 4년 뒤 노벨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1966년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고문에 추대되었다. 1971년 미국 유타 공립대학교 객원교수, 1973년 한국과학원 석좌교수로 활약하였다. 1974년 태평양과학협회(미국 소재) 이사로 선임되었고, 1975년 이론물리센터 소장이 되었다.
1965년에는 노벨상 수상자 후보 추천위원으로 위촉 된데 이어, 4년 뒤 노벨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1966년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고문에 추대되었다. 1971년 미국 유타 공립대학교 객원교수, 1973년 힌국과학원 석좌교수로 활약하였다. 1974년 태평양과학협회(미국 소재) 이사로 선임되었고, 1975년 이론물리센터 소장이 되었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로 초빙되어 박사 12명, 석사 24명 등 후진을 양성했다. 노환으로 인해 91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한국 현대 화학의 기반을 구축하고 칠순을 넘긴 나이에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로 초빙되어 박사 12명, 석사 24명 등 후진을 양성했다. 1992년 10월 26일 노환으로 인해 91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한국 현대 화학의 기반을 구축하고 한국 화학의 초석을 다진 공을 인정받아 과학자로는 처음으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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